2015년 11월 18일 수요일

관직이었기 때문이다.

의 관직이었기 때문이다. 그는 그저 이성양을 이공(李公)이라 불렀다. [언제나 이공의 은혜를 받는 저로서는 당연한 일!] 이성양의 묵인이 없었다면 여진이 지금과 같은 세력을 구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. 그것은 누르하치도 인정하는 바였다. 물론 그 대가는 컸다. 매년 누르하치 지배하의 마시에서 육십만 냥에 가까운 은자가 이성양의 사복을 채우는 데 쓰였다. '하긴 나라를 세우는 데 매해 육십만 냥이면 싸지.' 그 육십만 냥 중 일부가 순천부까지 흘러들어간다는 것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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